목차
《쿠쉬나메》 속 바실라는 정말 신라방이었을까? 놀라운 가설, 어디까지가 팩트일까
챕터 1.프롤로그
지금 제가 하나의 숫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만 129. 이게 무슨 숫자냐고요? 약 천 년 전 페르시아에서 기록된 한 서사시의 총 절 수입니다. 그런데 그 방대한 1만 129절 중, 무려 절반 가까운 분량이 단 한 나라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페르시아? 중국? 아닙니다. 놀랍게도 한반도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한반도 동남쪽에서 황금빛으로 빛났던 나라, 신라입니다. 이 사실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시면, "말이 된다"는 말이 자동으로 나올 겁니다.
오늘 우리가 파헤칠 텍스트의 이름은 《쿠쉬나메》입니다. 쿠쉬나메. 페르시아어로 '쿠쉬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건 불과 2006년의 일입니다. 한양대 이희수 교수가 이란 학자 다르유시 박사와의 대화 중 이 서사시의 존재를 알게 됐고, 직접 테헤란으로 날아가 원본 필사본을 손에 쥐었습니다. 800여 페이지짜리 중세 페르시아 필사본을 펼쳐 읽던 이희수 교수가 어느 순간 멈칫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자가 동쪽 바다 끝의 나라로 도망갑니다. 그 나라 이름이 '바실라'입니다. 그 나라 왕의 이름은 '타이후르'입니다. 그리고 왕에게는 공주가 있고, 공주의 이름은 '프라랑'입니다. 페르시아 왕자는 그 공주와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페르시아를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이희수 교수는 그 자리에서 직감했습니다. "이 나라, 혹시 신라 아닌가?" 그리고 5년에 걸친 검증 작업 끝에 2010년, 한국이슬람학회 논총에 논문을 발표합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굴과 신라 관련 내용." 이 논문 한 편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완전히 새로운 문을 열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총 여덟개의 챕터를 통해 이 서사시를 뒤집어 보고, 검증하고, 그 의미를 따져볼 겁니다. 준비됐습니까?
챕터 2. 《쿠쉬나메》란 무엇인가 —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서사시
먼저 《쿠쉬나메》 자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소설이 아닙니다. 수백 년 동안 이란 땅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민족 서사시입니다. 말로만 전해지던 이 이야기가 종이 위에 처음 기록된 건 11세기, 이란의 학자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필사본은 영국 국립박물관 도서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 서사시의 시대적 배경은 7세기 중엽입니다. 바로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7세기 중엽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던 바로 그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서기 651년, 페르시아 최후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가 암살당하면서 수백 년을 이어온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충격은 페르시아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고, 그 상처가 서사시라는 형태로 분출됐습니다.
《쿠쉬나메》의 핵심 서사는 이렇습니다. 악의 폭군 쿠쉬에 맞서 싸우는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 아비틴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동쪽으로, 더 동쪽으로 도망갑니다. 중국을 지나, 바다를 건너,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바실라입니다. 그리고 그 바실라에서 아비틴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신라 왕 타이후르의 환대를 받고, 함께 전쟁을 치르고, 결국 왕의 딸 프라랑과 결혼합니다. 이후 아비틴은 고국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프라랑은 그곳에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페레이둔, 훗날 폭군 자하크를 무찌르고 페르시아를 구원하는 전설적 영웅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짚어야 합니다. 《쿠쉬나메》의 줄거리 자체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못한 '아랍에 대한 이란의 복수'로 끝나는 데서 알 수 있듯, 이 이야기는 순수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대체역사 서사시에 가깝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임진왜란 당시 패배를 뒤집어 일본을 정복한다는 내용의 영웅소설 《임진록》과 성격이 비슷합니다. 즉, 현실의 패배를 이야기 속에서 복수로 갚는 민족적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명확히 하고 가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쿠쉬나메》 속 신라 이야기가 얼마나 '실제 역사'를 반영하는지를 판단할 때, 이 전제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사시가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쿠쉬나메》 전체 800여 페이지 중 신라 부분만 400여 페이지에 이르렀으며, 관련 내용까지 합치면 신라에 대한 내용은 500페이지에 달했습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분량이 신라에 할애됐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서사시가 신라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챕터 3. 바실라는 정말 신라인가 — 언어의 증거들
이제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쿠쉬나메》 속 '바실라'는 정말 신라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증거를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는 언어학적 증거, 둘째는 지리적 묘사입니다. 하나씩 따져봅시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작품 속 신라는 '바실라(Basila, Basilla)'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며, 이를 신라에 대한 페르시아식 표기로 해석하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바'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좋은, 아름다운'이란 의미이며 이는 접두사 수식으로 쓰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실라가 이슬람 문헌에 보이는 실라(Sīlā), 알실라(al-Sīlā) 등과 연결됩니다. 즉, 바실라에서 접두사 '바'를 떼어내면 '실라'가 남고, 이 '실라'가 곧 신라의 페르시아식 음차라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9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의 문헌에는 '알 실라(al-Sīlā)'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랍어에서 '알'은 정관사이니, 실라가 신라를 가리키는 아랍·페르시아권의 관용적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바실라'는 '아름다운 신라', 또는 '좋은 신라'라는 뜻의 수식어가 붙은 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본 대본에 언급된 '바실라 = 신라방' 가설을 다시 봅시다. 신라방이 방신라가 됐고, 그것이 뒤집혀 바실라가 됐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는 근본적인 언어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문자를 쓰지만, 그것이 단어의 음절 순서를 뒤집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서울을 아랍 문자로 적는다고 울서가 되지 않듯이, 신라방이 방신라로 뒤집혀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실라를 설명하는 더 자연스럽고 이미 학계에서 지지를 받는 해석은, 페르시아어 접두사 '바'에 신라의 음차 '실라'가 결합한 형태라는 쪽입니다. 이 설명이 훨씬 언어학적으로 정합성이 높습니다.
이번엔 지리적 묘사입니다. 《쿠쉬나메》는 바실라를 동방의 부유하고 아름다운 나라, 왕실 질서가 갖추어진 안정된 왕국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중세 이슬람권 문헌에서 신라를 '황금의 나라', '한 번 가면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로 그린 전통과도 이어집니다. 또한 서사시 속 바실라에는 군사력이 강한 왕국, 왕이 사위를 고르는 풍습, 그리고 바다를 접한 지형 묘사가 등장합니다. 신라가 반도인 것이 고대인에게는 섬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그 섬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는 매우 좁아서 두 사람조차도 함께 통과할 수 없습니다"라는 묘사가 그렇습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입니다. 내륙에서 접근할 경우 좁은 통로를 통해야 한다는 묘사는 한반도의 지형 특성과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물론 이것이 결정적 증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비슷한 지형을 가진 나라가 동아시아에 여럿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금이 풍부하고, 부유하고, 왕실 질서가 갖춰진 동방의 나라라는 묘사가 신라를 가리킨다는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건 사실입니다.
챕터 4. 이슬람 문헌이 증언하는 신라 — 황금의 나라의 비밀
잠깐 쉬어가면서, 더 넓은 맥락을 살펴봅시다. 사실 서역 문헌에 신라가 등장하는 건 《쿠쉬나메》만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이 전체 이야기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이슬람 역사학자, 지리학자, 여행가가 집필한 상당수의 아랍어 역사서와 지리서에서 신라에 관해 언급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븐 쿠르다지바는 신라에 거주하는 무슬림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이슬람 지리학자였으며, 알 마수디는 한반도에 이라크인이 진출, 거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도 있습니다. 앗 디마슈키, 알 누와이리, 알 마크리지 등의 저서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박해를 피한 일부 알라위족이 한반도에 망명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즉, 정치적 박해를 피해 신라까지 도망온 이슬람 세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역 관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연결고리가 신라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가 신라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가 특히 흥미롭습니다. 아랍·페르시아 학자가 쓴 여러 책에 신라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남아 있는데, 특히 공통적으로 양질의 금이 생산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랍인들은 신라를 유토피아이자 황금의 나라로 여겼습니다. 알 카즈위니, 알 바쿠위 같은 학자는 신라의 쾌적한 자연환경에 대해 극찬하였으며, 이슬람교도가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무려 20명에 달하는 이슬람 학자들이 9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신라 또는 고려를 자신들의 저서에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신라가 이슬람 세계에서 단순히 소문으로만 떠돌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교역하고, 사람이 오가고, 때로는 정치적 망명자까지 찾아오던 구체적인 현실의 나라였습니다.
8세기에서 9세기 무렵에는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까지 진출했고, 신라는 그 교역망의 동쪽 끝에 놓인 중요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 경주가 하나의 거대한 교류권 속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부터 경주까지 하나의 교류권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웅장한 그림인지 떠올려 보십시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와 신라의 수도가 같은 문명 네트워크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챕터 5. 경주의 땅에서 나온 페르시아의 흔적 — 고고학이 말하는 진실
자, 이제 대본의 온도가 올라갑니다. 문헌 속 기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땅이 증언해야 합니다. 경주 땅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인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등에서 이국적인 유리그릇들이 발굴됐습니다. 이들 유리그릇의 상당수는 서아시아나 지중해 주변에서 온 것으로 분석됩니다. 로마 제국기에 성행한 '로만글라스'의 후기 모델이거나, 로만글라스를 장식적 측면에서 업그레이드한 서아시아 사산조 페르시아의 '사산글라스'입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이 이름,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쿠쉬나메》의 시대적 배경인 페르시아 왕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입니다. 그 페르시아의 유리공예품이 경주 왕릉에서 발굴됐다는 것입니다.
황남대총 남분의 유리병은 연한 녹색의 달걀 모양 몸체에 금실이 감긴 푸른색 손잡이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노코에라는 그릇에 기원을 둔 이 같은 병은 4세기에서 5세기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나 로마, 터키 등에서 많이 제작됐습니다. 그리고 1973년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짙은 푸른색 유리잔이 발견됐는데, 한눈에 봐도 신라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이국적이었습니다.
왕의 무덤 속에 페르시아산 유리그릇이 들어있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최소한 이 유물들은 신라 왕실이 페르시아 계통의 물건을 귀하게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그 물건이 직접 교역을 통해 왔는지, 실크로드를 거쳐 중간 상인을 통해 왔는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충격적인 증거로 넘어갑니다. 경주 원성왕릉, 즉 괘릉과 구정동 방형 무덤의 무인상은 신라에 남은 서역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무인석들의 얼굴을 보면 누가 봐도 한국인의 얼굴이 아닙니다. 깊이 패인 눈, 높은 코, 곱슬거리는 수염. 중앙아시아 혹은 서아시아인의 외모입니다. 실제로 학자들은 이 무인석의 얼굴이 당나라 시대에 제작된 소그드인 마부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했던 상인 민족입니다. 그들 중 일부가 신라까지 와서 정착했을 가능성, 그리고 그 흔적이 왕릉을 지키는 석상의 얼굴로 남아있을 가능성.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실물 유물이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페르시아계 유물과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상을 통해 페르시아와 신라의 교류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추정이라는 단어가 쓰인 게 중요합니다. 고고학은 신중합니다. 하지만 그 신중한 학자들조차 추정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건, 그 가능성이 단순한 상상을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챕터 6. 타이후르, 프라랑, 가람 — 이름들의 미스터리
이제 이 서사시에서 가장 흥미롭고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입니다.
신라 왕의 이름은 타이후르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이름이 한국 이름 '태훈'의 기원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타이후르, 태훈. 확실히 비슷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언어학의 냉정한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중세 페르시아어에서 타이후르, 또는 타이푸르 계열의 이름은 서아시아권에서도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타이후르가 반드시 한국식 이름이 아니어도 설명이 된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기원을 가진 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건, 역사학적으로 위험한 방법론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 이름 'Mark'와 한국 이름 '막'이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어원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입니다.
그렇다고 타이후르가 신라 왕의 이름에서 왔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쿠쉬나메에서 신라 왕 타이후르는 아비틴에게 자신의 딸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혼 방식, 즉 왕이 사위가 될 인물에게 딸을 선택하도록 하는 풍습이 실제 신라에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나옵니다. 경문왕이 화랑이었을 시절, 헌안왕이 그에게 두 딸 중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물론 하나의 사례만으로 풍습이 확립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유사성 자체는 주목할 만한 포인트입니다.
이번엔 공주 이름 프라랑입니다. 한국어로 '파랑'은 푸른빛을 뜻합니다. 프라랑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한국어 파랑과 비슷하게 들리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어에서도 파란, 파라나 같은 이름이 자체적으로 존재합니다. 페르시아 여성 이름 '파라나' 또는 '파리나'는 별처럼 빛나는 존재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프라랑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자체의 언어 체계 안에서도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그럼 '가람'은 어떻습니까? 가람은 이 서사시에서 등장하는 인물 이름인데, 순우리말에서 가람은 강, 즉 물이 흐르는 곳을 뜻하는 아주 오래된 표현입니다. 백제 지명 중에도 가람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이 있고, 신라 시대 고유어에서도 이 표현이 쓰였습니다. 이란 땅의 서사시에 순우리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발음은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아랍어에서도 '가람(gharam)'은 열정, 사랑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름들의 유사성. 이것은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유사성들이 단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겹쳐 나온다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우연이 이렇게 여러 번 겹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서사시가 실제 신라의 언어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걸까요? 현재로서는 "흥미로운 가설"이라는 평가가 가장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 흥미로움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챕터 7.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 역사가 다시 쓰인다
자, 이제 마지막 챕터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마음껏 펼쳐봅니다. 만약 《쿠쉬나메》 속 바실라가 정말 신라라면. 만약 아비틴 왕자가 실제로 한반도에 당도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다시 쓰일 수 있을까요?
아랍 사료들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대 한반도와 아랍 세계 간의 해상 교역 관계를 주로 다루는 데 비해, 쿠쉬나메는 삼국 시대 후반인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순한 무역 관계를 넘어, 신라와 페르시아 사이에 정치적, 외교적 수준의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한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에 왕족이 동방의 우방국으로 피신한다는 서사,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고대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의 패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실제로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세력에 패망할 당시, 페르시아 왕족 일부는 당나라로 망명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팩트입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 페로즈가 당나라에서 활동한 기록이 당나라 문헌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부 페르시아 왕족 또는 귀족이 당나라를 거쳐 더 동쪽으로, 즉 신라까지 왔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불가능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쿠쉬나메》 서사 속에는 신라의 군사력과 궁전 생활, 지리와 과학에 관한 기록이 등장해 당시 신라가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문명국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군사력, 궁전 생활, 지리, 과학. 이 네 가지 묘사는 직접 방문하거나 실제로 교류한 사람이 아니면 담기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소문만으로는 이런 세부 묘사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신라는 지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나라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반도 동남쪽 구석에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동쪽 끝 허브로서 콘스탄티노플부터 바그다드, 장안을 거쳐 경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 네트워크의 당당한 참여자였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주장에 학문적 엄밀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쿠쉬나메의 전체 맥락 속에서 신라 부분을 더욱 자세하게 이해하고 원본과 번역본의 오류를 최대한 줄이며, 여러 전문가들 간의 연구 교류를 통해 쿠쉬나메의 실체에 더욱 접근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검증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챕터 8. 에필로그. 역사는 믿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검증된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정리해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들을 한 문장씩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쿠쉬나메》 속 '바실라'가 신라를 가리킨다는 해석은 학계에서 유력하게 지지받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어 접두사 '바'와 신라의 음차 '실라'가 결합한 형태라는 설명은 언어학적으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둘째, 이슬람 세계가 신라를 황금의 나라, 유토피아로 기록했다는 사실은 복수의 아랍 문헌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이것은 명백한 팩트입니다.
셋째, 경주 왕릉에서 출토된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의 유리공예품과 서역인 모습의 무인석은 신라와 페르시아 문명권 사이에 실질적 교류가 있었음을 물질적으로 증명합니다.
넷째, 타이후르, 프라랑, 가람 같은 등장인물 이름들의 한국어 유사성은 흥미롭지만 현재로서는 언어학적 추정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바실라 = 신라방' 가설은 문자 방향성 논리가 언어학적으로 성립하지 않아 현재 지지를 받기 어렵습니다.
여섯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쿠쉬나메》는 신라가 단순히 동아시아 안에 갇힌 나라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정황 증거입니다. 천 년 전 페르시아인들이 신라를 이야기 속의 무대로 삼을 만큼, 신라는 그들에게 실재하는 현실의 나라였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보다 검증 가능한 근거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탐구가 있기에 우리는 잊혀진 연결고리를 찾아냅니다. 천 년 전 페르시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 이야기 속 무대가 지금 우리 발 아래 이 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쿠쉬나메》 속 바실라, 그리고 그 나라의 공주 프라랑. 그들의 이야기는 순수한 창작입니까, 아니면 천 년의 시간이 묻어버린 진실의 흔적입니까?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십시오.
참고문헌 (References)
1
Lee, H. (2010).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발굴과 신라 관련 내용 [Discovery of the ancient Persian epic Kush-nameh and its contents related to Silla]. 한국이슬람학회논총 (Korean Journal of Islamic Studies), 20(3), 9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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