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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 알아야 할 문무대왕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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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 파도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작은 바위섬 하나. 관광객들은 그곳을 보고 그냥 "신기한 바위"라고 생각하고 지나칠지 모르지만, 사실 그 바위 아래에는 1,300년 전 한 왕의 마지막 소원이 잠들어 있다. 경주를 여행하다 보면 반드시 한 번은 듣게 되는 이름, 문무대왕릉. 신라의 왕들은 대부분 경주 시내의 너른 들판이나 산기슭에 거대한 봉분으로 묻혔는데, 유독 한 사람만은 자신의 뼈를 바다에 묻으라고 명령했다. 도대체 왜 그는 죽어서도 땅이 아닌 바다를 선택했을까. 그 답을 찾아가다 보면, 단순한 왕의 무덤 이야기를 넘어 한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사, 그리고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인 미스터리와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7세기, 신라가 가장 치열한 전쟁의 한가운데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숙적이었던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무너지고, 신라는 마침내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문무왕이다. 그는 아버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뜻을 이어받아 통일 전쟁을 진두지휘했고, 명장 김유신과 함께 마침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삼국통일을 함께 이뤄낸 동맹국 당나라가, 전쟁이 끝나자 한반도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으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동맹이 하루아침에 최대의 적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신라는 또 한 번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해야 했고, 문무왕은 끝까지 버텨내며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를 완성시킨다. 그야말로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왕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나라를 위해 싸운 왕이, 681년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신하들에게 충격적인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묻어라." 당시 왕이라면 응당 화려한 능과 거대한 봉분을 기대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통일전쟁의 영웅이 스스로 무덤조차 남기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왕은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죽음을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임무의 시작으로 여긴 왕. 그가 왜 굳이 '용'이 되고자 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이 용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알아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용은 단순한 상상의 동물이 아니었다. 비를 부르고 바다를 다스리며, 무엇보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수호신적 존재로 여겨졌다. 문무왕은 자신이 동해의 용이 되어 바다를 건너오는 적, 특히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겠다고 믿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그가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동해에 장사 지내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은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대왕암'이라 부르는, 경주 동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 위 바위섬, 문무대왕릉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을 넘어선다. 대왕암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저 자연 그대로의 바위섬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인공적으로 파낸 듯한 수로가 십자(十) 형태로 나 있고, 그 한가운데 해수면 바로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m가 넘는 거대한 거북 모양의 납작한 돌, 일명 '복개석'이 자리하고 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수로 안쪽은 늘 잔잔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마치 인도의 산치대탑이나 백제 미륵사 석탑처럼, 사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갖춘 불탑 혹은 승탑의 구조를 본떠 만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단순히 뼈를 바다에 던진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추모 공간'을 바다 위에 인공적으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흥미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정말 저 거대한 거북 모양 돌 아래에 문무왕의 유골함이 실제로 묻혀 있을까?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식 수중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전혀 다른 해석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하나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골과 부장품을 실제로 모신 '수중왕릉'이라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대왕암이 왕릉이 아니라 화장한 유골을 바다에 뿌린 '산골처(散骨處)', 즉 추모를 위한 의식 장소였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두 번째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꽤 구체적이다. 먼저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은 유언에서 인도식 화장을 따르라고 분명히 당부했는데, 화장을 한 후 뼛가루까지 별도의 석실에 봉안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해동금석원』에 수록된 문무왕릉비에는 '뼈를 모두 빻았다(滅粉骨)'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유골을 그대로 보관한 게 아니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흩뿌렸음을 암시한다. 또한 중앙의 거대한 바위 아래에는 유골을 모실 만한 별도의 석실이나 납골 장치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한자 '장(葬)'이라는 글자가 시신을 매장한다는 뜻 외에도 화장한 가루를 뿌리는 행위까지 포괄해서 쓰일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거론된다. 즉, 대왕암 아래에 문무왕의 유골함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의미 없는 바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특별히 조성된 추모 공간, '해중(海中) 추모 시설'로서의 의미는 충분히 살아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문무왕의 뼈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가 정말로 그 거북 돌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위에서 거행된 의식을 통해 가루가 되어 동해 전체로 흩어졌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1,300년 전 신라인들이 죽은 왕을 위해 바다 한가운데에 이토록 정교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참고로 이 대왕암을 이루는 화강암은 무려 약 5천만 년 전에 형성된 암석이며, 표면에 보이는 북동-남서 방향의 갈라진 절리들은 약 3천만 년 전 대규모 지진의 흔적이라고 한다. 인간의 역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지구의 시간이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왕암은 단순한 사적일 뿐 아니라, 경북동해안 국가지질공원의 지질유산으로도 함께 지정되어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문무왕이 떠난 뒤, 그의 아들 신문왕에게 또 하나의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동해에 갑자기 작은 섬 하나가 떠올랐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그 섬에는 낯선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낮에는 한 그루였다가 밤이 되면 두 그루로 갈라진다는 기이한 소문까지 함께 따라왔다. 신문왕은 사람을 보내 그 대나무를 베어 오게 했고,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었다. 이 피리가 바로 신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비의 악기, '만파식적'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스스로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이 끝나며, 나라의 온갖 근심이 사라졌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이 모든 기적이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과, 역시 세상을 떠난 김유신의 영혼이 함께 나라를 돕고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 믿음은 단순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로만 남지 않았다. 신문왕은 아버지가 용이 되어 머무는 동해를 향해 실제로 절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감은사다. 흥미로운 점은 감은사의 설계 자체에도 이 전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법당 아래에 동해 쪽을 향하는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속에서 절 안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감은사터에는 조류의 들고 나는 시기를 계산할 수 있었다고 알려진 '태극장대석'이라는 돌이 남아 있고, 이 자리에서 바라보면 대왕암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즉, 아들은 단순히 전설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전설을 현실의 건축 구조로까지 구현해낸 셈이다.

오늘날 문무대왕릉을 찾는 사람들은 단지 신비로운 바위섬 하나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끝없이 펼쳐진 동해를 바라보며, 1,300년 전 한 왕이 마지막 순간에 품었던 마음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후손들에게 화려한 무덤이나 거대한 권력의 상징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나라를 지키는 영원한 수호자로 바꾸어 놓고자 했다. 그것이 실제로 용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저 나라를 사랑한 한 인간의 간절한 바람이 후대에 의해 아름다운 전설로 다시 쓰인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답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경주의 푸른 동해를 마주하고 서 있으면 1,30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그 왕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파도 소리에 섞여 전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문무대왕릉은 그렇게, 신라인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한 왕의 마지막 진심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장소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국가유산청. (n.d.). *경주 문무대왕릉 (慶州 文武大王陵)*.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701580000
국사편찬위원회. (n.d.). *대왕암*.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100360&code=kc_age_10
한국학중앙연구원. (n.d.).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470
위키미디어 재단. (2026, January 8). *경주 문무대왕릉*.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경주_문무대왕릉
나무위키 기여자. (n.d.). *문무대왕릉*. 나무위키. https://namu.wiki/w/문무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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